어렸을 때 본 드라마 속의 꽤나 전형적인 장면 중 한 가지는 이렇다. 순탄치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해 못 해주는 엄마를 야속해하며 살아가던 딸, 어느 날 “나는 죽어도 엄마처럼은 안살거야!” 바락바락 대들며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집을 뛰쳐나간다. (그리고 도시로 상경해 힘든 일을 전전하며 악착같이 돈을 번다.) 어렸을 때부터 나 역시 엄마의 인생을 지켜보며 그 대사를 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어 왔지만, 이게 웬걸. 엄마는 내가 미처 이 말을 내뱉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너랑 엄마랑 같냐? 너는 엄마처럼 살면 안 되지!!!”
‘너는 절대로 엄마처럼은 살지마’
사실 ‘엄마처럼 살지 않는 삶’을 상상해보기란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아마도, 딸인 내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상상해봤을 때 엄마가 느꼈을 암담함의 정도만큼 쉬웠으리라. 가족 이외에 ‘나 자신’이라는 것은 생각해볼 수도 없었던 삶, 그리고 그 안에서 남자에게 ‘여자’로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 그래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위로’해주는 사회,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를 얼마나 잘 했는지에 대한 사회의 인정이 자신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척도인 인생. ‘그래, 너라도 후회 없이 살아야지’라는 엄마의 태도는 ‘행복한 가정/여성’상에 보내는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냉소다. (엄마는 가끔씩 ‘제대로 된’ 남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너네 아빠 같은 사람만 아니면 돼’라는 전제가 실현 가능할거라고 스스로도 잘 믿지 않는 것 같다.)
재밌는 것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라는 말보다 “너는 나이 들어서도 수영도 하고 헬스 같은 것도 해서 관리하면서 살아”, “돈 벌어서 엄마 악어백 사준다고 한 약속 잊지마라.”라는 말을 더 많이 했던 우리 어무니처럼- ‘자식 키운 보람’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포기하거나 다르게 마음먹기 시작한 여자가 비단 우리 엄마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12.9%) |
그렇지 않다 (87.1%) |
“딸이 본인처럼 살기 바라는가?” (통계 : EZ서베이)
“딸의 결혼과 성공 중 더 중요한 것은?” (통계 : EZ서베이)
- 딸을 둔 30대 이상 여성 233명을 대상으로 한 결혼가치관에 대한 설문조사 (출처 : 한국경제 기사) -
결혼이 아닌 다른 삶을 상상하고 기획하는 여성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건 그런 젊은 여성들이 그저 메뚜기 떼처럼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여성들을 무대 위로 등장시키고 ‘뭐, 그렇게 살아도 나쁠 건 없겠지’라는 말로 뽐뿌질 해 주는 또 다른 여성들, 엄마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네 안하네, 저출산이네, 가족의 붕괴네, 위기네 하는 호들갑에 맞장구쳐주기엔 나는 내 인생이 너무 소중했고, 엄마는 결혼생활이 너무 피곤했던 거다.
‘‘대신에 돈은 있어야지’
그. 런. 데.
이제 나를 이해하고 내 편이 됐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수영’과 ‘헬스’와 ‘악어백’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왕자를 기다린다고 하면 환상임을 알면서도 ‘그래라’하며 두고 볼지언정, 지금 이대로 만족하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면 ‘내가 그러라고 널 뼈 빠지게 가르쳤냐?!’ 분노했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라며 불안해했다.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온갖 노력과 헌신을 통해 키워놓은 (그래서 자신과 다르게 학벌도 능력도 있고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을 만큼 젊고 앞날이 창창한) 딸이 ‘성공’을 기다리고 준비하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IMF의 직격탄을 맞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부모님의 세대 경험 속에서, 엄마는 결혼으로 ‘남자’를 옆에 붙여 놓아도 요즘 같은 세상에는 딸인 나에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토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가르쳐준 대로 살지 않는 여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제재와 처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엄마이기도지만, 내 딸이 ‘결혼 안 한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비난의 손가락질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강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찌질한 여자’라서 처하게 되는 경제적 어려움과 차별이다.
카우프만은 <혼자 사는 여자, 백마 탄 왕자>라는 책에서 독신의 등장이 단순히 특정한 시대에 단절된 형태로 나타났다기보다, 광범위한 ‘사회의 개인화/개별화(individualization)' 맥락에서 가능했고 이는 더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인이 자신만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려는 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이 오랜 시간을 걸쳐 점점 더 강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의 자기규정을 가능하게 해 준 주체의 개별화가 어디에든 존재하는 신자유주의 기획과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비혼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무엇이 요구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기 의지, 자기 결정, 자기 책임, 자기 규정… 모든 것이 ‘나’로만 수렴되는 상황에서, ‘찌질한’ 비혼생활을 긍정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건 어떻게 가능할까. 결혼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 처럼 보이는) 순간, 이 사회에서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내 앞에 놓여 있는 건 뭘까. 그건 결혼한 사람들보다 ‘더’ 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과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한 의미 있는 내 삶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고립감이다. 그래서 결국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자유로워지는 건 자본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자본의 획득여부는 온전히 나의 능력이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니 어떻게 ‘골드미스’라는 임파서블 미션을 열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혼을 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잘 사는 것’이 비혼을 선택한 이유나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열심히 일해서 더 여유롭게 즐기고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여자가 결혼을 안할거라면 돈이라도 있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라는 불안감을 만들어 낸다. 그 불안감에서 쿨하게 벗어날 수 있는 ‘독립적인’ 여성은 또 얼마나 될까.
나 만큼이나 나를 지켜보는 엄마 역시 불안한 요즘, 엄마는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비혼운동 하는 딸내미(그래요, 저예요…)를 전과 다르게 부쩍 종용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할 게 아니라면 돈이라도 많이 벌든가 둘 중에 하나는 해야겠다고. 엄마가 결혼노래 대신 수영‧헬스․악어백 노래를 불렀을 때 나는 오히려 기뻐했지만(돈? 돈은 그냥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지. 결혼해서 사는 것보다야 훨씬 쉽잖아!) 실은 행복한 결혼도 수영‧헬스․악어백도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현가능한 삶도 아니다.
다른 모델을 기획할 수 있는 힘,
며칠 전에도 비혼의 삶에 대한 인터뷰를 하면서 ‘비혼은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되는 여성들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형태가 아닌가요?’하는 질문을 받았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꼭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하지만 “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라고 묻는 사람은 아직 못봤다) 비혼을 주제로 숱한 인터뷰를 해왔고 이런 질문이 처음도 아니었지만, 최근의 이런저런 고민 때문인지 순간 당황했다.
어… 어? 그, 그러게요? 혼자 살아갈 능력이 없고 어느 정도 돈…이 없다면 힘들겠죠, 힘들…까? 아닌가?!
그러다 이내 곧 얼마 전에 발견한 ‘침대녀 퍼포먼스’라는 기사를 읽고 어처구니 없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침대녀가 뭐냐고?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자신의 외모와 스펙만 믿고 결혼을 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한가로이 침대에 누워 왕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게으른 여성’ 정도 되겠다. (한 결혼정보회사에서 넘쳐나는 비혼과 만혼 때문에 나타나는 결혼 기피 현상을 너무 근심한 나머지 이런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라고… -_-)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서 가만히 앉아서 남자를 기다릴 정도로 자신감 있는 스펙을 가지려면 얼마나 부지런해야 되는지 아냐고~”
“뭐야, 성공해야 된다고 열심히 일하고 스펙 쌓고 돈 벌어서 자기계발 해도 결국 결혼 안 하면 게으른 여자 딱지 붙이는구만. 어떻게 해도 실패한 인생이라는 거 아냐?!”
그래.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추라는 건지 알 수 없게 하는 것이야 말로 여자들의 상상과 관계맺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전략이지. 그래서 정상가족의 환상을 쫓는 것과 신자유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골드미스’라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덜 나쁜지를 고민하는 건 너무나 허망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안’이라는 단어로 비혼의 상황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흐트러뜨리는 것, 이런 외부의 협박이 불가능한 다른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오랜 기간 고민하고 결정한 내 삶의 가치관을 인정해줄 사람이 없다는 고립된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운명의 주인’ 혹은 ‘온전한 자립’에 대한 열망을 혼자서 간직하고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이어나가는 것-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정상가족 구성을 중심으로 고정된 생애발달주기와 성장과업에서 벗어난 삶을 상상한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그 가능성에 기대면서 가치관을 공유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는 옆 동료의 인터뷰 답변을 들으면서, 역시 잘 못 살고 있는 건 아니구나 생각한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관계’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그래서 그 관계에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비혼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참고자료]
쟝 클로드 카우프만, 성귀수 역, 2001, <혼자 사는 여자, 백마 탄 왕자>, 문학세계사.
한국경제, ‘엄마들 속마음 "직장에서 잘 나가는게 결혼보다 낫다" 68.2%’, 2009년 11월 20일.
연합뉴스, ‘레드힐스, 침대녀 퍼포먼스’, 2010년 6월 5일.
MBC 뉴스데스크, ''결혼관' 세대차이‥엄마 따로, 딸 따로', 2010년 7월 4일.
* 글을 퍼 가실 때에는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언니네 채널넷(www.unninet.net) 2010년 가을특집‘비-혼란' 中

|